辛酉년 己亥월 乙酉일(1861. 12. 2.), 베이징 자금성 양심전. 다섯 살 황제가 앉은 자리와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태후가 앉았다. 스물여섯 살의 서태후가 휘장 뒤에서 나랏일을 듣기 시작한 날이다.
2026. 10. 4.
나乙丑편재 · 쇠일주
식신丁亥정인 · 사월주
비견乙未편재 · 양년주
丑未沖丑未刑
목 2화 1토 2금 0수 1
01
겨울 문턱의 덩굴
청나라 도광 15년 음력 10월 10일, 만주 양람기(鑲藍旗)에 속한 관리 혜징(惠徵)의 집에서 딸이 태어났다. 훗날 서태후로 불리는 예허나라씨는 乙未년 丁亥월 乙丑일(1835. 11. 29.)에 태어났다. 궁중 문서에는 그해 혜징이 베이징에서 일했고 어린 시절 집이 베이징 시쓰파이러우의 피차이 골목(劈柴胡同)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안후이 우후나 산시 창즈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지만, 이 기사는 베이징을 기준으로 간지를 맞춘다. 몇 시에 태어났는지는 기록에 없다. 명식은 태어난 해와 달과 날의 간지 여섯 글자로 세우고, 시각을 알면 두 글자를 더한다. 이 기사는 여섯 글자로 읽는다.
사주의 주인공 격인 일간(日干, 태어난 날의 천간)은 乙이다. 같은 나무라도 곧게 솟는 큰 나무 甲과 달리, 乙은 풀과 덩굴에 가깝다. 혼자 높이 서기보다 곁의 것을 감고 올라 자리를 넓혀 가는 나무다. 태어난 날의 지지는 丑, 겨울 끝의 언 흙이다. 乙에게 丑은 편재(偏財)가 된다. 일간이 지지마다 쓰는 힘을 열두 단계로 나눈 12운성(十二運星)으로 보면 乙은 丑에서 쇠(衰), 한창때를 지나 힘을 고르는 자리에 든다.
태어난 달의 간지는 丁亥다. 입동이 들고 스무하루가 지난 날이었다. 亥는 겨울 문턱의 큰 물이고, 물은 나무를 기르니 乙에게 정인(正印)이 된다. 명리가 강약을 가를 때 가장 먼저 보는 곳이 태어난 달인데, 이렇게 태어난 달이 일간 편에 선 경우를 득령(得令)이라 한다. 乙은 亥에서 사(死)에 든다. 사는 이름 때문에 겁을 주지만, 명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기운이 한곳에 가라앉은 자리로 읽는다. 달의 천간 丁은 등불 같은 불로, 乙이 제 안에서 꺼내 밝히는 식신(食神)이다.
태어난 해의 간지는 乙未다. 해의 천간 乙은 일간과 같은 글자, 비견(比肩)이다. 명리는 비견을 어깨를 나란히 한 또 하나의 나로 읽는다. 未는 한여름 끝의 마른 흙으로 乙에게 편재이고, 乙은 未에서 양(養), 어미 품에서 길러지는 자리에 든다. 띠로 치면 양띠다.
여섯 글자 사이에는 충과 형이 하나씩 선다. 태어난 해의 未와 날의 丑이 정면으로 부딪혀 丑未沖을 이루고, 같은 두 글자가 丑未刑도 이룬다. 충(沖)은 흔히 깨지는 일로만 겁을 주지만, 명리는 자리가 움직이는 기운으로 먼저 읽는다. 형(刑)은 '형벌'로만 풀려 겁을 주는데, 명리에서는 서로 깎고 다듬는 관계로 먼저 읽는다. 신살도 하나 선다. 태어난 날의 丑을 기준으로 달의 亥는 역마(驛馬), 자리를 옮기는 신살이다.
여섯 글자를 오행으로 세면 나무가 둘(乙·乙), 흙이 둘(未·丑), 불이 하나(丁), 물이 하나(亥)다. 쇠는 한 글자도 없다. 乙에게 쇠는 관성(官星), 나무를 베고 다듬는 기운이다. 명리는 이 자리를 규율과 이름, 몸담는 공적인 자리로 읽고, 옛 명리서는 여자의 명식에서 남편의 자리로도 읽었다.
강약도 저울에 올려 본다. 태어난 달의 물이 乙을 살리지만, 날과 해의 지지는 모두 흙이고 달의 丁은 나무의 기운을 끌어내 쓴다. 乙일에 올 수 있는 시주 열두 가지를 모두 넣어 보면 여덟은 중화(中和), 넷은 신약(身弱)으로 나온다. 신강(身强)으로 기우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이 기사는 명식에 비어 있는 쇠가 대운과 해와 날의 간지로 들어온 때를 따라간다.
02
난귀인
대운(大運)은 10년마다 바뀌는 운의 흐름으로, 음(陰)의 해에 태어난 여자는 태어난 달의 간지에서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간다. 예허나라씨의 첫 대운 戊子 대운(1838. 12.~1848. 12.)은 세 살 무렵 시작됐다. 戊는 산처럼 두꺼운 흙으로 乙에게 정재(正財)이고, 子는 한겨울의 물로 편인(偏印)이다. 子는 명식의 丑과 子丑合(土)을 이룬다. 합(合)은 두 글자가 끌어당겨 새 기운을 만드는 관계다. 태어난 해의 未를 기준으로 子는 도화(桃花)다. 도화는 흔히 바람기로만 풀리지만, 명리에서는 사람의 눈길을 끄는 힘으로 먼저 읽는다.
열세 살 무렵 대운은 己丑 대운(1848. 12.~1858. 12.)으로 넘어갔다. 己丑은 두 글자 모두 편재다. 대운의 丑은 명식의 未와 다시 丑未沖, 丑未刑을 이룬다.
청나라 황실은 3년마다 팔기 집안의 딸들을 불러 모아 황제의 비빈을 골랐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함풍제의 후궁 간택에서 예허나라씨가 뽑혔다. 壬子년 丙午월 己未일(1852. 6. 26.), 열여섯 살의 예허나라씨는 베이징 시라 골목(錫拉胡同)의 집을 떠나 궁으로 들어갔다. 받은 자리는 여섯째 등급의 귀인(貴人)이었고, 칭호는 난귀인(蘭貴人)이었다.
그해의 천간 壬은 큰 강물 같은 물로 乙에게 정인이고, 명식의 丁과 丁壬合(木)을 이뤘다. 달의 午는 한여름의 불로 식신이다. 乙은 午에서 장생(長生), 새로 태어나는 자리에 든다.
癸丑년(1853) 여름 아버지 혜징이 병으로 숨졌고, 甲寅년(1854) 그녀는 의빈(懿嬪)으로 올랐다. 만주 여인 가운데 드물게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녀에게, 병약한 함풍제는 상소를 읽히고 자기 뜻대로 지시를 적어 넣게 했다.
丙辰년 壬辰월 庚辰일(1856. 4. 27.), 의빈이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다. 함풍제의 아들 가운데 자라서 살아남은 아이는 재순 하나뿐이다. 그날 그녀는 의비(懿妃)로 올랐고, 이듬해에는 의귀비(懿貴妃)가 되어 후궁 가운데 황후 다음 자리에 섰다.
해의 천간 丙은 한낮의 해 같은 불로 乙에게 상관(傷官)이다. 옛 명리서는 여자의 명식에서 식상(食傷)을 자식의 자리로 읽었다. 날의 간지는 庚辰이다. 庚은 단단한 쇠로 乙에게 정관(正官)이고, 명식에 한 글자도 없던 관성이다. 이 庚이 명식의 두 乙과 각각 乙庚合(金)을 이뤘다. 해와 달과 날의 지지는 모두 辰, 봄 끝의 젖은 흙이다. 乙은 辰에서 관대(冠帶), 갓을 쓰고 세상에 나서는 자리에 든다.
03
열하에서 돌아온 행렬
대운은 庚寅 대운(1858. 12.~1868. 12.)으로 바뀌었다. 庚은 정관이고, 명식의 두 乙과 각각 乙庚合(金)을 이룬다. 명식에 비어 있던 쇠가 처음 대운으로 든 10년이다. 寅은 봄을 여는 큰 나무로 乙에게 겁재(劫財)다. 乙은 寅에서 제왕(帝旺), 가장 힘이 센 자리에 든다. 寅은 명식의 亥와 寅亥合(木)을 이룬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톈진을 거쳐 베이징으로 다가오던 庚申년 乙酉월 己巳일(1860. 9. 22.), 함풍제는 의귀비와 비빈들을 데리고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피했다. 동생 공친왕 혁흔(奕訢)이 베이징에 남아 협상을 맡았다. 庚申년 丙戌월 乙未일(1860. 10. 18.), 연합군이 황실 정원 원명원에 불을 질렀다. 그해의 간지 庚申은 두 글자 모두 정관이다. 庚은 명식의 두 乙과 각각 乙庚合(金)을 이뤘다.
원명원이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함풍제는 술과 약에 기대며 병이 깊어졌다. 그는 숙순(肅順), 재원(載垣), 단화(端華)를 비롯한 대신 여덟 명을 '찬양정무왕대신'으로 세워 어린 아들을 보필하게 했다. 辛酉년 丙申월 癸卯일(1861. 8. 22.), 함풍제는 피서산장에서 서른 살로 숨졌다. 다섯 살 재순이 황제 자리를 이었다.
이튿날인 辛酉년 丙申월 甲辰일(1861. 8. 23.), 생모 의귀비는 황태후로 올랐다. 함풍제의 황후 뉴호록씨는 자안태후(慈安太后), 의귀비는 자희태후(慈禧太后)가 됐다. 사람들은 머무는 전각의 방향을 따서 두 사람을 동태후와 서태후라고 불렀다.
그해의 간지 辛酉는 두 글자 모두 쇠, 편관(偏官)이다. 대운의 庚 위에 해의 辛酉가 겹쳐, 명식에 없던 쇠가 세 글자로 늘었다. 酉는 명식의 丑과 酉丑半合(金)을 이뤘다. 乙은 酉에서 절(絶)에 든다. 절은 이름 때문에 끊어져 끝나는 자리로 오해받지만, 명리는 앞의 기운이 끊기고 새 기운을 받을 준비를 하는 자리로 읽는다. 옛 명리서가 여자의 명식에서 남편의 자리로 읽은 관성이, 남편을 잃은 해에 가장 두꺼워진 셈일까.
어사 동원순(董元醇)이 두 태후가 정사를 맡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여덟 대신은 이 왕조에 황태후가 휘장을 친 전례가 없다며 거부했다. 조문하러 열하에 온 공친왕이 두 태후와 손을 잡았다. 관이 베이징으로 떠날 때 숙순은 관을 따르고, 두 태후와 어린 황제는 먼저 길을 나섰다.
辛酉년 戊戌월 乙卯일(1861. 11. 2.), 베이징에 먼저 닿은 두 태후는 여덟 대신을 물리치는 조서를 내렸다. 숙순은 목이 베였고, 재원과 단화에게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이 내려졌다. 연호는 기상(祺祥)에서 동치(同治)로 바뀌었고, 공친왕은 의정왕에 올랐다. 이 일은 그해의 간지를 따서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 불린다.
정변 날의 간지 乙卯에서 乙은 일간과 같은 비견이다. 乙은 卯에서 건록(建祿), 제 힘으로 서는 자리에 든다. 卯는 명식의 亥, 未와 함께 亥卯未三合(木)을 이뤘다. 셋이 모여 일간과 같은 나무를 이루는 삼합(三合)이다. 달의 戊戌에서 戌은 명식의 丑과 丑戌刑을, 未와 未戌刑을 이뤘다.
04
휘장 뒤의 열세 해
辛酉년 己亥월 乙酉일(1861. 12. 2.), 황제가 두 태후를 모시고 양심전에 나와 수렴청정이 시작됐다. 운육정의 『숭릉전신록』은 두 태후가 휘장을 친 자리를 두고, 황제가 가운데 앉고 그 뒤를 얇은 비단 휘장으로 가렸으며 휘장 뒤에 두 태후가 좌우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고 적었다. 두 태후의 이름으로 내린 유지는 이랬다. "휘장을 치고 정사를 듣는 것은 즐겨서 하는 일이 아니다. 황제가 학문을 이루면 곧 정사를 돌려줄 것이다." 상소는 두 태후가 읽고, 대신들이 쓴 지시문에 함풍제가 남긴 '동도당' 도장을 찍어 내보냈다.
날의 간지 乙酉에서 乙은 다시 일간과 같은 비견이고, 酉는 편관이다. 酉는 명식의 丑과 酉丑半合(金)을 이뤘다. 달의 亥는 명식의 亥와 겹쳐 亥亥自刑을 이뤘다. 같은 글자가 겹칠 때 서는 형을 자형(自刑)이라 한다.
조정은 한인 관료 증국번(曾國藩)에게 태평천국 진압을 맡겼고, 甲子년(1864) 여름 그의 상군이 태평천국의 수도 톈징, 지금의 난징을 함락했다. 베이징에는 외국어와 천문, 수학을 가르치는 동문관(同文館)이 문을 열었다. 乙丑년(1865) 봄 공친왕은 두 태후 앞에서 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모든 관직에서 쫓겨났다가, 의정왕 칭호만 잃은 채 외교 관청인 총리아문으로 돌아왔다.
대운은 辛卯 대운(1868. 12.~1878. 12.)으로 넘어갔다. 辛은 편관, 卯는 일간과 같은 나무인 비견이다. 乙은 卯에서 건록에 든다. 卯는 명식의 亥, 未와 亥卯未三合(木)을 이룬다.
壬申년(1872) 가을 열여섯 살의 동치제가 아로특씨를 황후로 맞았고, 癸酉년(1873) 봄 두 태후는 휘장을 거두고 정사를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甲戌년 丁丑월 甲戌일(1875. 1. 12.), 천연두를 앓던 동치제가 열여덟 살로 숨졌다. 아들은 없었다. 서태후는 순친왕 혁현(奕譞)과 자기 여동생 사이에서 난 세 살배기 재첨(載湉)을 황제로 세웠다. 연호는 광서(光緖)가 됐고, 두 태후는 다시 휘장 뒤에 앉았다. 어린 광서제는 서태후를 '친아빠(親爸爸)'라고 불러야 했다.
달력은 해를 넘겼지만 입춘 전이라 해의 간지는 아직 甲戌이다. 해와 날이 모두 甲戌이었다. 甲은 큰 나무로 乙에게 겁재이고, 戌은 가을 끝의 흙으로 정재다. 두 戌은 명식의 丑과 각각 丑戌刑을, 未와 未戌刑을 이뤘다. 달의 丑은 명식의 未와 丑未沖, 丑未刑을 이뤘다.
05
홀로 남은 휘장
대운은 壬辰 대운(1878. 12.~1888. 12.)으로 넘어갔다. 壬은 정인이고, 명식의 丁과 丁壬合(木)을 이룬다. 庚辰년(1880) 서태후는 큰 병을 앓았고, 2년 뒤에야 털고 일어났다.
辛巳년 壬辰월 壬申일(1881. 4. 8.), 자안태후가 마흔세 살로 갑자기 숨졌다. 휘장 뒤에는 서태후 혼자 남았다. 그해의 천간 辛은 편관이고, 지지 巳는 초여름의 불로 상관이다. 巳는 명식의 亥와 정면으로 부딪혀 巳亥沖을 이뤘다. 날의 申은 쇠, 정관이다.
甲申년(1884) 봄, 베트남을 두고 프랑스와 벌인 싸움에서 청군이 밀렸다. 서태후는 공친왕을 비롯한 군기대신 전원을 물리고 예친왕 세탁(世鐸)을 수석에 앉혔다. 중요한 일은 광서제의 생부 순친왕과 상의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렸다. 그해의 지지 申은 정관이고, 乙은 申에서 태(胎), 기운이 새로 잉태되는 자리에 든다.
대운은 癸巳 대운(1888. 12.~1898. 12.)으로 넘어갔다. 癸는 빗물 같은 물로 편인이고, 巳는 상관이다. 巳는 명식의 亥와 巳亥沖을 이룬다. 태어난 해의 未를 기준으로 巳는 역마다. 乙은 巳에서 목욕(沐浴), 갓 태어나 몸을 씻는 자리에 든다.
己丑년(1889) 정월, 광서제가 혼례를 올렸다. 황후는 서태후가 고른 조카 정분(靜芬)이었고, 근비와 진비 자매가 후궁으로 함께 들어왔다. 己丑년 丙寅월 己卯일(1889. 3. 4.), 쉰세 살의 서태후가 정사를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날의 卯는 다시 일간과 같은 비견이고, 명식의 亥, 未와 亥卯未三合(木)을 이뤘다.
06
이화원과 바다
광서제는 베이징 서북쪽의 청의원을 고쳐 이화원(頤和園)이라 이름 붙이고 서태후에게 내주었다. 황제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대신들을 거느리고 이화원을 찾았고, 가장 어려운 일은 태후에게 물어 정했다.
甲午년(1894) 여름, 조선을 두고 일본과 전쟁이 벌어졌다. 그해는 서태후가 세는 나이로 예순이 되는 해였다. 자금성에서 이화원까지 길을 꾸미는 경축 계획은 북양함대가 황해에서 크게 꺾이면서 취소됐다. 생일인 甲午년 甲戌월 癸丑일(1894. 11. 7.), 서태후는 자금성 안의 영수궁에서 조촐한 예만 받았다.
이듬해 乙未년 庚辰월 甲午일(1895. 4. 17.), 이홍장(李鴻章)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내려놓고 은 2억 냥과 타이완을 내주었다. 그해의 간지 乙未는 서태후가 태어난 해의 간지와 같다.
戊戌년 戊午월 乙巳일(1898. 6. 11.), 광서제가 나라의 방향을 새로 정한다는 「명정국시조(明定國是詔)」를 내렸다.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를 곁에 둔 황제는 과거와 관제, 학교와 군대를 바꾸는 조서를 잇달아 내렸다. 이 개혁을 무술변법이라 부른다.
황제가 군대를 움직여 이화원을 에워싸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戊戌년 辛酉월 丁亥일(1898. 9. 21.), 이틀 전 이화원에서 서둘러 궁으로 돌아와 있던 서태후가 다시 훈정에 나섰다. 광서제는 병을 이유로 중남해 호수 가운데의 작은 섬 영대(瀛臺)로 옮겨졌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외국으로 달아났다. 이레 뒤인 戊戌년 辛酉월 甲午일(1898. 9. 28.), 담사동(譚嗣同)을 비롯한 여섯 사람이 베이징 채시구 형장에서 목이 베였다.
그해의 간지 戊戌은 두 글자 모두 흙, 정재다. 戌은 명식의 丑과 丑戌刑을, 未와 未戌刑을 이뤘다. 명식의 丑과 未에 戌까지 들어와 세 글자가 모두 형으로 묶인 해다. 정변이 일어난 달의 간지 辛酉는 두 글자 모두 편관이다. 신유정변이 일어난 해의 간지와 똑같다. 날의 亥는 명식의 亥와 亥亥自刑을 이뤘다.
“법술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까지 믿을 것이 못 되겠소? 지금 중국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소. 기댈 것은 사람들의 마음뿐이오. 그 마음마저 잃으면 무엇으로 나라를 세우겠소?”
서태후, 의화단 문제로 연 어전 회의에서(운육정 『숭릉전신록』)庚申日 · 庚子年07
서쪽으로 간 가마
석 달 뒤 대운이 甲午 대운(1898. 12.~1908. 12.)으로 바뀌었다. 甲은 겁재, 午는 식신이다. 午는 명식의 未와 午未合(火)을 이루고, 乙은 午에서 장생에 든다. 태어난 날의 丑을 기준으로 午는 도화다.
癸卯년(1903) · 중해의 배 위에 앉은 서태후 · 훈령 촬영(1903~1905년 무렵)
庚子년(1900) 봄,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건 의화단이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교회가 불타고 일본 공사관 서기관이 길에서 살해됐다. 庚子년 壬午월 庚申일(1900. 6. 16.), 서태후는 의란전에 왕과 대신 100여 명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 있던 한림원 관리 운육정(惲毓鼎)은 의화단은 난을 일으킨 무리일 뿐 믿을 수 없다는 대신의 말을 태후가 이렇게 꺾었다고 적었다. "법술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까지 믿을 것이 못 되겠소?"
庚子년 壬午월 乙丑일(1900. 6. 21.), 조정은 열강을 향해 싸움을 선포하는 조서를 내렸다. 청군과 의화단이 베이징의 공사관 구역을 두 달 가까이 에워쌌다. 선포한 날의 간지 乙丑은 서태후가 태어난 날의 간지와 똑같다. 해의 庚은 정관이고, 명식의 두 乙과 각각 乙庚合(金)을 이뤘다. 해의 子는 명식의 丑과 子丑合(土)을 이뤘다.
여덟 나라 연합군이 베이징 성 안으로 들어온 이튿날, 庚子년 甲申월 庚申일(1900. 8. 15.) 새벽,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북쪽 성문 덕승문을 빠져나갔다. 일행은 쉬안화와 다퉁, 타이위안을 거쳐 그해 가을 시안에 닿았다. 광서제가 아끼던 진비는 이 무렵 우물에 빠져 숨졌다. 『청사고』는 태후가 길을 떠날 때 우물에 잠겼다고만 적었다.
떠난 날의 간지 庚申은 두 글자 모두 정관이다. 해의 庚과 달의 申까지 더하면, 명식에 한 글자도 없던 쇠가 그날 네 글자로 들어왔다. 날의 庚은 명식의 두 乙과 각각 乙庚合(金)을 이뤘다. 乙은 申에서 태에 든다.
辛丑년 丙申월 戊子일(1901. 9. 7.), 이홍장과 경친왕 혁광(奕劻)이 열한 나라와 신축조약에 서명했다. 청은 은 4억 5000만 냥을 39년에 걸쳐 갚고, 베이징 공사관 구역에 외국 군대가 머무는 것을 받아들였다.
辛丑년이 저물 무렵에야 일행은 허베이 정딩에서 객차 21량짜리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역에서 자금성까지 가는 행렬은 처음으로 백성들도 길가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08
유리 건판 앞에서
돌아온 서태후는 각국 공사 부인들을 궁으로 불러 차를 대접했고, 癸卯년(1903)에는 미국 공사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미국 화가 캐서린 칼이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 보낼 초상을 그리게 했다.
癸卯년(1903) · 훈령이 찍은 서태후(1903~1905년 무렵)
같은 해 영어와 프랑스어로 통역을 맡던 여관 덕령(德齡)의 오빠 훈령(勛齡)이 궁 안에서 유리 건판 사진기를 세웠다. 서태후는 옷과 장신구, 배경과 소품을 정해 두고 자리를 바꿔 가며 사진을 찍게 했다. 그녀를 찍은 사진은 이 무렵의 것뿐이고, 남은 유리 건판은 절반 넘게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아서 M. 새클러 갤러리에 있다.
조정은 신정(新政)이라 불리는 개혁에 나서 대신들을 일본과 유럽에 보냈다. 乙巳년(1905) 천 년 넘게 이어진 과거 시험이 폐지됐고, 丙午년(1906) 가을에는 헌법 시행을 준비하라는 조서가 나왔다.
戊申년 癸亥월 壬申일(1908. 11. 13.), 서태후는 순친왕 재풍(載灃)을 섭정왕에 앉히고,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푸이를 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훗날 푸이는 자서전에 그날의 희미한 기억을 남겼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였고, 칙칙한 휘장 너머로 몹시 여위고 무섭게 생긴 얼굴이 보였다고 했다. 그는 울음을 터뜨렸고, 건네받은 사탕을 바닥에 내던지며 유모를 찾았다. 태후는 "못된 아이로구나. 데려가 놀게 하라"고 말했다.
戊申년 癸亥월 癸酉일(1908. 11. 14.), 영대에 갇혀 지내던 광서제가 서른일곱 살로 숨졌다. 서태후는 푸이를 새 황제로 세우는 조서를 내렸고, 그날로 태황태후에 올랐다. 戊申년 癸亥월 甲戌일(1908. 11. 15.), 서태후는 중남해 의란전에서 일흔두 살로 숨을 거뒀다. 광서제가 숨진 지 하루 만이다.
숨진 해의 지지 申은 정관이다. 달의 癸亥에서 癸는 편인, 亥는 정인이고, 亥는 명식의 亥와 亥亥自刑을 이뤘다. 날의 甲戌에서 甲은 겁재, 戌은 정재다. 戌은 명식의 丑과 丑戌刑을, 未와 未戌刑을 이뤘다. 무술년 정변의 해에 섰던 형이 마지막 날 다시 섰다.
己酉년 乙亥월 庚辰일(1909. 11. 16.), 그녀의 관은 베이징 동쪽 준화의 청동릉 보타욕 정동릉에 묻혔다. 날의 간지 庚辰은 아들 재순이 태어난 날의 간지와 같다. 壬子년 壬寅월 戊午일(1912. 2. 12.), 조카 융유태후가 퇴위 조서를 내려 청 왕조가 끝났다. 戊辰년(1928) 여름에는 군벌 손전영(孫殿英)의 부대가 정동릉을 파헤쳐 부장품을 쓸어 갔다. 戊子년(2008) 가을, 중국 연구진은 광서제의 머리카락과 유골에서 보통 사람의 2천 배가 넘는 비소가 나왔다고 발표했다. 누가 독을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날의 간지
乙未년 丁亥월 乙丑일(1835. 11. 29.)베이징의 만주 양람기 관리 혜징의 집에서 태어났다.태어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