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子년 甲子월 己卯일(1889. 1. 3.), 토리노. 거리에서 소란이 일었고, 경찰 두 사람이 마흔네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다가왔다. 사흘 뒤 그는 바젤의 옛 동료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교수님, 따지고 보면 저는 신이 되기보다 바젤의 교수로 있는 편이 훨씬 좋겠습니다."
2026. 10. 4.
나戊辰비견 · 관대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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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戌沖辰辰自刑辰戌沖
목 2화 0토 4금 0수 0
01
두 개의 辰
라이프치히와 나움부르크 사이의 마을 뢰켄에서 목사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첫아들에게 프로이센 왕의 이름을 붙였다. 아이가 태어난 날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마흔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아흐레 뒤 세례식에서 아버지는 「누가복음」 1장 66절을 아들의 구절로 골랐다. "이 아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甲辰년 甲戌월 戊辰일(1844. 10. 15.) 프로이센 작센 지방의 뢰켄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를 날짜별로 엮은 연보는 오전 10시 무렵이라고 적는다. 명식은 태어난 해와 달과 날의 간지 여섯 글자로 세우고, 시각을 알면 두 글자를 더한다. 시각이 '무렵'으로만 전하는 만큼 이 기사는 여섯 글자로 읽는다.
사주의 주인공 격인 일간(日干, 태어난 날의 천간)은 戊다. 같은 흙이라도 씨를 받아 기르는 논밭의 己와 달리, 戊는 산이나 둑처럼 크고 두꺼운 흙이다. 태어난 날의 지지는 辰, 물기를 머금은 봄의 흙이다. 戊에게 辰은 같은 흙이고 음양도 같아 비견(比肩)이 된다. 일간이 지지마다 쓰는 힘을 열두 단계로 나눈 12운성(十二運星)으로 보면 戊는 辰에서 관대(冠帶), 갓을 쓰고 세상에 나서는 자리에 든다.
태어난 해의 간지는 甲辰이다. 甲은 곧게 선 큰 나무, 흙을 뚫고 올라오는 기운이라 戊에게는 편관(偏官)이 된다. 戊에게 나무는 관성(官星)이고, 명리는 이 자리를 규율과 윗사람, 몸담는 조직으로 읽는다. 해의 지지도 날과 같은 辰이어서, 해와 날에 앉은 두 辰이 辰辰自刑을 이룬다. 같은 글자가 겹칠 때 서는 형(刑)을 자형(自刑)이라 한다. 형은 '형벌'로만 풀려 겁을 주지만, 명리에서는 서로 깎고 다듬는 관계로 먼저 읽는다. 태어난 해와 날 어느 쪽을 기준으로 봐도 辰은 화개(華蓋)다. 화개는 흔히 고독으로만 풀리지만, 명리는 학문과 예술에 파고드는 기운으로도 읽는다.
태어난 달의 간지는 甲戌이다. 한로가 들고 이레가 지난 날이었다. 달의 천간에도 甲이 서서 명식에는 나무가 두 겹이다. 戌은 늦가을의 마른 흙으로 역시 비견이다. 戊는 戌에서 묘(墓), 기운을 거두어 곳간에 넣는 자리에 든다. 명리가 강약을 가를 때 가장 먼저 보는 곳이 태어난 달인데, 이렇게 태어난 달이 일간과 같은 기운이면 득령(得令)이라 부른다. 달의 戌은 해와 날의 두 辰과 정면으로 마주 서 각각 辰戌沖을 이룬다. 충(沖)은 흔히 깨지는 일로만 겁을 주지만, 명리는 자리가 움직이는 기운으로 먼저 읽는다.
여섯 글자를 오행으로 세면 흙이 넷(辰·戌·戊·辰), 나무가 둘(甲·甲)이다. 불은 없고, 쇠와 물은 한 글자도 없다. 戊일에 올 수 있는 시주 열두 가지를 모두 넣어 보면 여섯은 신강(身强), 여섯은 중화(中和)로 나온다. 생시가 '무렵'으로만 전하는 이 명식을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는 이유다. 연보가 적은 오전 10시 무렵은 巳시이고, 巳시는 신강으로 나오는 여섯 가운데 하나다.
戊에게 불은 인성(印星), 흙을 낳는 기운이고 명리는 이 자리를 어머니와 배움으로 읽는다. 쇠는 흙이 낳는 식상(食傷), 제 안의 것을 말과 글로 꺼내는 기운이다. 물은 흙이 막아 다스리는 재성(財星)이고, 옛 명리서는 남자의 명식에서 이 자리를 아내로도 읽었다. 이 기사는 명식에 없던 불과 쇠와 물이 해와 달과 날의 간지로 들어온 때를 따라간다.
02
목사관의 아이
아버지는 戊申년(1848) 늦여름 뇌의 병을 얻었고, 말하는 힘과 시력을 차례로 잃어 갔다. 그리고 己酉년 辛未월 丁丑일(1849. 7. 30.), 서른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은 네 살이었다. 그로부터 반년 뒤에는 두 살배기 막내 루트비히 요제프도 숨졌다.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옮겨 할머니, 결혼하지 않은 두 고모와 한집에 살았다.
아버지가 숨진 해의 간지 己酉에서 己는 논밭의 흙, 戊와 같은 흙이되 음양이 다른 겁재(劫財)다. 己는 명식의 두 甲과 각각 甲己合(土)을 이뤘다. 酉는 가을의 쇠, 戊가 제 안에서 꺼내 드러내는 상관(傷官)이고, 명식의 두 辰과 각각 辰酉合(金)을 이뤘다. 명식에 없던 쇠가 해의 지지로 들어온 해였다. 마흔네 살의 니체는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의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1절에 이 일을 수수께끼처럼 적었다. "나는 내 아버지로서는 이미 죽었고, 내 어머니로서는 아직 살아서 늙어 간다."
대운(大運)은 10년마다 바뀌는 운의 흐름으로, 양(陽)의 해에 태어난 남자는 태어난 달의 간지에서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간다. 니체의 첫 대운은 乙亥 대운(1852. 7.~1862. 7.)이다. 乙은 풀과 덩굴 같은 나무, 戊에게 정관(正官)이다. 亥는 겨울의 물이고 戊가 다스리는 편재(偏財)다. 명식에 없던 물이 대운으로 처음 흘러든 열 해였다. 戊는 亥에서 절(絶)에 든다.
戊午년(1858) 가을, 열네 살의 니체는 장학생으로 기숙학교 슐포르타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히브리어, 프랑스어를 익혔다.
그해의 간지 戊午에서 午는 한여름의 불, 戊를 낳는 정인(正印)이다. 명식에 없던 불이 처음 해의 지지로 들었고, 午는 명식의 戌과 午戌半合(火)을 이뤘다. 戊는 午에서 제왕(帝旺), 가장 힘이 센 자리에 든다.
대운은 丙子 대운(1862. 7.~1872. 7.)으로 넘어갔다. 丙은 한낮의 해 같은 불로 편인(偏印)이고, 子는 한겨울의 물로 정재(正財)다. 子는 명식의 두 辰과 각각 子辰半合(水)을 이룬다. 甲子년(1864) 가을 본 대학교에 들어간 그는 한 학기 만에 신학을 접어 어머니를 크게 노하게 했다.
乙丑년 壬午월 壬子일(1865. 6. 11.), 그는 믿음이 깊은 누이 엘리자베트에게 긴 편지를 썼다. "여기서 사람들의 길이 갈린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바란다면 믿어라. 진리의 제자가 되고 싶다면 캐물어라." 편지를 쓴 날의 달과 날에는 壬이 둘 섰다. 壬은 큰 강이나 바다 같은 물, 戊에게 편재다. 날의 지지 子는 정재이고, 명식의 두 辰과 子辰半合(水)을 이뤘다. 달의 午는 정인으로 명식의 戌과 午戌半合(火)을 이뤘다. 명식에 없던 물과 불이 한날 든 날이다.
03
헌책방의 쇼펜하우어
乙丑년(1865) 가을, 그는 스승 프리드리히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옮겼다. 라이프치히의 론 헌책방에서 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어 들었다. 평소 책을 쉽게 사지 않던 그가 몇 장 넘겨 보고는 그 자리에서 값을 치렀다.
戊辰년(1868)
포병 연대에서 1년 지원병으로 복무하던 그는 戊辰년(1868) 봄, 말에 오르다 가슴을 안장 앞머리에 부딪쳐 몇 달을 앓았고 군 복무도 그대로 끝났다. 그해의 간지 戊辰은 그가 태어난 날의 간지와 똑같다. 해의 辰은 명식의 두 辰과 辰辰自刑을, 명식의 戌과 辰戌沖을 이뤘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누이 오틸리에는 라이프치히의 동양학자 헤르만 브로크하우스의 아내였다. 戊辰년 癸亥월 戊戌일(1868. 11. 8.), 남몰래 라이프치히에 온 바그너가 그 집에서 스물네 살의 대학생을 만났다. 바그너는 니체의 아버지와 같은 해에 태어난 쉰다섯 살이었다. 바그너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연주했고, 두 사람은 쇼펜하우어 이야기를 길게 나눴다.
이튿날 니체는 친구 에르빈 로데에게 그날 밤을 적어 보냈다. "그는 놀랄 만큼 생기 있고 불같은 사람이야. 말이 아주 빠르고 재치가 넘쳐서, 이런 사사로운 모임을 아주 유쾌하게 만들지."
그날의 간지 戊戌에서 戊는 일간과 같은 비견이고, 戌은 명식의 두 辰과 각각 辰戌沖을 이뤘다. 달의 간지 癸亥는 두 글자 모두 물이다. 癸는 빗물 같은 물로 戊에게 정재이고, 일간 戊와 戊癸合(火)을 이뤘다. 亥는 편재다. 명식에 한 글자도 없던 재성이 달의 천간과 지지를 모두 채운 날이었다.
04
스물네 살의 교수
그해 겨울 스위스 바젤 대학교가 고전문헌학 교수를 찾았다. 리츨은 이 제자가 큰일을 해낼 것이라는 추천서를 보냈다. 니체는 박사 학위도, 교수 자격 논문도 없는 스물네 살이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는 서둘러 시험 없이 박사 학위를 주었다.
己巳년(1869)
己巳년 戊辰월 戊寅일(1869. 4. 17.), 그가 스스로 신청한 대로 프로이센 국적이 말소됐다. 그 뒤 그는 어느 나라 국적도 갖지 않은 채 생을 마쳤다. 그해의 간지 己巳에서 己는 겁재로 명식의 두 甲과 甲己合(土)을 이뤘다. 巳는 초여름의 불, 戊를 낳는 편인이다. 戊는 巳에서 건록(建祿), 제 힘으로 서는 자리에 든다.
己巳년 己巳월 戊申일(1869. 5. 17.), 그는 루체른 호숫가 트립셴에 있는 바그너의 집을 처음 찾았다. 그 뒤 그는 두세 주마다 그 집에 며칠씩 묵었고, 친구에게 이 만남을 쇼펜하우어에게 입은 은혜 다음가는 삶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적었다.
己巳년 己巳월 己未일(1869. 5. 28.), 그는 바젤 대학교에서 「호메로스의 인격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취임 강연을 했다. 강연은 문헌학의 모든 작업이 철학적 세계관 안에 담겨야 한다는 고백으로 끝났다. 강연 날의 해와 달과 날에는 己가 셋 섰다. 세 글자 모두 명식의 두 甲과 甲己合(土)을 이뤘다. 날의 지지 未는 한여름 끝의 마른 흙으로 겁재이며, 명식의 戌과 未戌刑을 이뤘다.
辛未년 庚子월 戊申일(1872. 1. 2.), 첫 책 『음악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이 나왔다. 그리스 비극을 꿈과 질서의 아폴론적인 것과 도취의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맞물린 예술로 풀어낸 책이었다. 바그너는 책을 읽고 코지마에게 말했다. "이게 내가 바라던 바로 그 책이오."
달력은 해를 넘겼지만 입춘 전이라 간지로는 아직 辛未년이다. 해의 천간 辛은 戊에게 상관, 날의 지지 申은 식신(食神)이다. 달의 천간 庚도 식신이다. 식신은 이름 때문에 흔히 먹을 복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명리에서는 재주가 결과물로 나오는 기운으로 먼저 읽는다. 명식에 없던 쇠가 한날 세 겹으로 든 날, 그의 첫 책이 세상에 나왔다. 달의 子는 명식의 두 辰과 子辰半合(水)을, 해의 未는 명식의 戌과 未戌刑을 이뤘다.
동료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네 살 아래의 문헌학자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는 소책자 「미래의 문헌학!」을 내어 그의 책을 학문이 아니라고 몰아붙였다. 그해 겨울 학기,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은 둘이었다. 하나는 독문학도, 하나는 법학도였다.
05
바이로이트를 떠나다
대운은 丁丑 대운(1872. 7.~1882. 7.)으로 넘어갔다. 丁은 촛불 같은 불, 戊를 낳는 정인이다. 丑은 한겨울의 언 흙으로 겁재이고, 명식의 戌과 丑戌刑을 이룬다. 명식에 없던 불이 대운의 천간으로 들어 열 해를 흘렀다.
丙子년 丙申월 癸丑일(1876. 8. 13.), 바이로이트의 새 축제극장에서 「니벨룽의 반지」 첫 연속 공연이 막을 올렸다. 독일 황제가 앉은 객석에 니체도 있었다. 그는 무대의 진부함과 관객의 천박함에 질렸다.
戊寅년(1878) 봄, 아포리즘을 모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나왔다. 코지마는 몇 장 넘겨 보고 치워 두었다고 편지에 적었다.
두통과 눈의 통증, 위장병이 갈수록 잦아졌다. 己卯년 戊辰월 乙酉일(1879. 5. 2.), 서른네 살의 니체는 대학에 사직서를 냈다. 대학은 연봉의 3분의 2인 3000프랑을 연금으로 정해 주었다.
그해의 간지 己卯에서 卯는 풀과 덩굴의 나무, 戊에게 정관이다. 卯는 명식의 戌과 卯戌合(火)을 이뤘다. 사직서를 낸 날의 천간 乙도 정관이다. 관성은 몸담는 조직의 자리로 읽는 글자다. 그 자리의 글자가 해와 날에 겹쳐 든 날, 그는 열 해 동안 몸담은 대학을 떠났다. 날의 지지 酉는 상관으로 명식의 두 辰과 辰酉合(金)을 이뤘고, 戊는 酉에서 사(死)에 든다.
그 뒤 열 해 동안 그는 몸에 맞는 날씨를 따라 떠돌았다. 여름은 스위스 실스마리아에서, 겨울은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라팔로, 토리노와 프랑스의 니스에서 났다.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편두통과 구토가 번갈아 찾아왔다.
06
해발 6000피트
辛巳년(1881) 여름, 그는 처음으로 스위스 엥가딘의 실스마리아에서 여름을 났다. 실바플라나 호숫가 숲을 걷다가 수를레이 근처에서 피라미드처럼 솟은 큰 바위 앞에 멈춰 섰다. 모든 것이 똑같이 되풀이된다는 영원회귀의 생각이 그 자리에서 떠올랐다고 그는 훗날 적었다. 종이 한 장에 휘갈긴 메모 아래에는 이런 서명이 붙었다. "인간과 시간의 저편 6000피트."
그해의 간지 辛巳에서 辛은 상관, 巳는 편인이다. 戊는 巳에서 다시 건록에 든다. 이듬해 대운은 戊寅 대운(1882. 7.~1892. 7.)으로 바뀌었다. 戊는 일간과 같은 비견이다. 寅은 큰 나무, 戊를 누르는 편관이고 戊는 寅에서 장생(長生), 새로 태어나는 자리에 든다. 태어난 해와 날 어느 쪽을 기준으로 봐도 寅은 역마다.
壬午년 甲辰월(1882. 4.),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그는 스물한 살의 러시아 여성 루 폰 살로메를 만났다. 파울 레와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가 이어 준 만남이었다. 셋은 함께 공부하며 사는 공동체를 꿈꿨다. 살로메가 남긴 회고로는 니체가 레를 통해 청혼했고, 살로메는 친구로만 지내고 싶다며 거절했다.
壬午년 乙巳월 壬子일(1882. 5. 13.), 루체른의 사자 기념비 앞에서 니체는 살로메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살로메의 회고로는 이번에는 그가 직접 청혼했고,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루체른에 머문 며칠 사이 셋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수레에 탄 살로메가 채찍을 들었고, 니체와 레가 수레를 끄는 모습이다.
그날의 해와 날에는 壬이 둘 섰다. 壬은 戊에게 편재이고, 날의 지지 子는 정재다. 옛 명리서는 남자의 명식에서 재성을 아내의 자리로도 읽었다. 명식에 한 글자도 없던 재성이 한날 세 겹으로 든 날, 살로메의 회고대로라면 그는 다시 청혼했다. 子는 명식의 두 辰과 子辰半合(水)을 이뤘다. 해의 午는 정인이고, 명식의 戌과 午戌半合(火)을 이뤘다.
그해 여름 『즐거운 학문』이 나왔다. 125절에서 한 미친 사람은 환한 오전에 등불을 켜 들고 장터로 달려가 신을 찾는다고 외친다. 사람들이 비웃자 그는 우리가 신을 죽였다고 말하고, 등불을 땅에 내던져 깨뜨린다. "나는 너무 일찍 왔다."
그해 여름 튀링겐의 타우텐부르크에서 몇 주를 함께 보내는 동안, 보호자로 따라온 누이 엘리자베트는 살로메를 오빠에게서 떼어 놓으려 했다. 가을이 되자 레와 살로메는 다시 만날 약속 없이 그를 떠났다. 어머니와도 다툼이 벌어져, 어머니는 그를 '아버지 무덤의 수치'라고 불렀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그는 친구 프란츠 오버베크에게 적었다. "삶의 이 마지막 한입은 지금껏 씹은 것 가운데 가장 질겼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125절 「미친 사람」壬午年07
아무도 사지 않은 책
그해 겨울 그는 이탈리아 바닷가 라팔로로 내려갔다. 그리고 열흘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썼다.
癸未년 甲寅월 戊子일(1883. 2. 13.), 리하르트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숨졌다. 이튿날 제노바에서 니체는 평소와 달리 저녁 신문을 샀고, 첫눈에 베네치아에서 온 전보가 들어왔다. 그는 훗날 『이 사람을 보라』에 1부의 마지막 대목을 바그너가 베네치아에서 죽은 바로 그 거룩한 시각에 끝냈다고 적었다. 癸未년 甲寅월 丙申일(1883. 2. 21.), 그는 말비다 폰 마이젠부크에게 썼다. "그토록 우러르고 사랑한 사람에게 여섯 해 동안 적이 되어야 했던 것은 힘든 일,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바그너가 숨진 해의 천간 癸는 정재로 일간 戊와 戊癸合(火)을 이뤘다. 달의 간지 甲寅은 두 글자 모두 편관이다. 날의 간지 戊子에서 子는 정재이고 명식의 두 辰과 子辰半合(水)을 이뤘다.
癸未년(1883) 여름 1부가 천 부 나왔다. 乙酉년(1885), 그는 4부를 자기 돈으로 40부만 찍었다. 그중 친구들에게 나눠 준 것은 일곱 부였다.
乙酉년 辛巳월 丁丑일(1885. 5. 22.), 누이 엘리자베트가 반유대주의 운동가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나움부르크에서 결혼했다. 바그너의 생일에 맞춘 날이었고, 니체는 베네치아에 머문 채 식에 가지 않았다. 그날의 간지 丁丑은 아버지가 숨진 날의 간지와 같다.
그의 책을 내던 출판인 에른스트 슈마이츠너가 반유대주의 운동에 뛰어들자, 니체는 자기 책들이 '반유대주의자의 구덩이'에 묻혀 버렸다고 오버베크에게 적었다. 丙戌년(1886), 그는 『선악의 저편』을 자기 돈으로 600부 찍었다. 그해 누이 부부는 독일인 정착촌 '새 게르마니아'를 세우려고 정착민들을 이끌고 파라과이로 떠났다. 니체는 이 계획을 우스꽝스럽게 여겼다.
戊子년(1888) 봄 코펜하겐에서 덴마크 비평가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그의 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고, 그해 니체는 『바그너의 경우』와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를 비롯해 책 다섯 권을 썼다.
戊子년 壬戌월 己未일(1888. 10. 15.), 토리노에서 마흔네 번째 생일을 맞은 그는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를 쓰기 시작했다. 책의 첫머리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것이 익어 가고 포도만 갈색으로 물드는 것이 아닌 이 완벽한 날, 햇살 한 줄기가 내 삶 위로 떨어졌다. 오늘 내가 마흔네 번째 해를 묻은 것은 헛일이 아니다."
생일의 달 壬戌에서 戌은 명식의 두 辰과 다시 辰戌沖을 이뤘다. 날의 간지 己未에서 己는 명식의 두 甲과 甲己合(土)을, 未는 명식의 戌과 未戌刑을 이뤘다. 해의 子는 정재로 명식의 두 辰과 子辰半合(水)을 이뤘다.
08
토리노의 겨울
戊子년 甲子월 己卯일(1889. 1. 3.), 토리노 거리에서 그는 무너졌다. 소란을 일으킨 그에게 경찰 둘이 다가갔다는 것 말고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죽은 뒤 곧 퍼진 이야기가 있다.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 저편에서 마부가 말을 채찍질하자 그가 달려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졌다는 것이다. 확인된 기록이 아니라 전하는 이야기다.
己亥년(1899)
달력은 해를 넘겼지만 입춘 전이라 간지로는 아직 戊子년이다. 해와 달의 지지가 모두 子, 정재였고 두 子는 명식의 두 辰과 각각 子辰半合(水)을 이뤘다. 달의 천간 甲은 편관이다. 날의 간지 己卯에서 己는 명식의 두 甲과 甲己合(土)을 이뤘고, 卯는 정관으로 명식의 戌과 卯戌合(火)을 이뤘다.
그 뒤 며칠 동안 그는 코지마 바그너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짧은 글을 보냈다. 서명은 대개 '디오니소스'였고, 몇 장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적었다. 바젤의 옛 동료 부르크하르트에게 보낸 긴 편지에 적힌 날짜는 戊子년 乙丑월 壬午일(1889. 1. 6.)이다. 신이 되기보다 교수로 있는 편이 나았겠다는 첫 줄 뒤에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시중드는 값까지 쳐서 25프랑을 내고, 차와 장보기는 손수 하며, 해진 장화 때문에 고생합니다."
편지를 받은 부르크하르트가 신학자 오버베크에게 알렸고, 토리노로 달려간 오버베크는 戊子년 乙丑월 丙戌일(1889. 1. 10.) 니체를 바젤의 정신병원에 데려다 놓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다시 예나의 대학 정신병원으로 옮겼다.
己丑년 己巳월 庚戌일(1889. 6. 3.), 정착촌 경영에 실패한 매제 푀르스터가 파라과이에서 독을 먹고 목숨을 끊었다. 庚寅년 辛巳월 甲午일(1890. 5. 13.), 어머니는 아들을 나움부르크의 집으로 데려왔다.
癸巳년(1893) 가을, 남편을 잃은 엘리자베트가 파라과이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오빠의 원고와 출판을 차례로 손에 넣었고, 이듬해 초 나움부르크의 집에 니체 문서보관소를 열었다.
丁酉년 甲辰월 戊申일(1897. 4. 20.), 일곱 해 동안 아들을 돌본 어머니 프란치스카가 일흔한 살로 숨졌다. 그해의 천간 丁은 戊를 낳는 정인이다. 명리는 인성을 어머니의 자리로도 읽는다. 지지 酉는 상관으로 명식의 두 辰과 辰酉合(金)을 이뤘다. 그해 여름 엘리자베트는 오빠를 바이마르의 빌라 질버블리크로 옮겼다.
庚子년 甲申월 庚午일(1900. 8. 25.) 한낮, 바이마르. 폐렴을 앓던 니체는 밤사이 다시 뇌졸중을 겪고 쉰다섯 살로 숨을 거뒀다. 누이는 그를 뢰켄 교회의 아버지 곁에 묻었다. 장례식에서 그의 오랜 비서 페터 가스트가 외쳤다. "그대의 이름이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거룩하기를!"
그날의 해와 날에는 庚이 둘 섰다. 庚은 쇠, 戊에게 식신이다. 달의 申도 식신이다. 해의 子는 정재로 명식의 두 辰과 子辰半合(水)을, 날의 午는 정인으로 명식의 戌과 午戌半合(火)을 이뤘다. 명식에 없던 불과 쇠와 물이 한날 모두 든 날이었다.
辛丑년(1901), 엘리자베트는 오빠의 유고 노트를 제 뜻대로 엮어 『권력에의 의지』를 펴냈다. 연구자들은 이 책이 니체의 뜻을 담지 않았다고 보고, 니체 유고를 새로 편집한 마치노 몬티나리는 위작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녀는 壬申년(1932)부터 甲戌년(1934)까지 문서보관소에서 여러 차례 아돌프 히틀러를 손님으로 맞았다. 엘리자베트는 乙亥년(1935)에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에는 히틀러가 참석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머리말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특히 나를 다른 누구로 착각하지 말라!"